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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만주 독립운동사적지 다롄 탐방 2

 

 

이륭양행은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가 1919년 5월 중국 단둥에 설립한 무역선박회사로 비밀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지 쇼는 아버지의 고향인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던 조선의 항일운동을 도왔다. 이륭양행에서는 독립운동가의 망명, 독립자금 모집, 무기 반입, 연통제 운영 등의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백범 김구도 삼일운동 직후에 단둥에 도착하여 이륭양행의 배인 계림호를 타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의친왕 이강의 망명 시도도 이륭양행을 통해서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지 루이스 쇼는 "망국민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소국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인 바, 다수의 한국인 지기들로 부터 그 독립운동에 관해 상의를 받았을 때는 적당한 조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 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는 등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인물이다. 1920년 7월 그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내란죄로 4개월 간 옥고를 치룬 뒤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2012년 쇼의 친손녀가 건국공로훈장을 대신 받았다.

 

 

압록강 철교는 평안북도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다리로서 한반도와 중국 둥베이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1911년과 1943년 2개가 가설되었는데 하류 쪽에 먼저 가설된 다리는 길이 944m로 압록강을 사이에 둔 한중 국경의 한 명물로 1908년 8월에 착공하고 3년 동안 연인원 5만 명을 동원하여 1911년 10월에 준공하였다. 6.25전쟁 때 파괴되어 중국에 연결된 절반만 남아 있고, 상류 쪽의 다리는 재래교의 100m 상류지점에 새로운 다리를 착공하여 1943년 4월 개통하였다. 복선형 철교로 건설된 이 다리는 1990년 조중우의교라 개칭되었다. 중국에서는 중차오유이차오라 부른다.

 

 

집안은 중국 길림성에 있는 도시로 고구려시대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위치했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아홉 곳의 원시 유적을 비롯하여 마제 석기,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되고, 한무제 때 현도군의 관할 지역에 편입되었다가 고구려가 다시 현도군을 물리치고 옛 땅을 회복하면서 서기 3년 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했다. 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까지 집안은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역할을 425년간 지속했다. 광개토왕릉비, 장군총, 각저총, 무용총 등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국가역사문화명성에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하였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능비이다. 장수왕 2년인 414년에 세워졌으며 자갈이 중간중간 박혀 있는 응회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6.39m, 무게 37톤에 달한다. 많이 가공하지 않아 울퉁불퉁한 표면에 바둑판처럼 선을 바듯하게 그은 뒤 14×15㎝ 정도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글씨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예서체로 네 면에 걸쳐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인들은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정복하고 신라와 가야 지역에 군대를 보낸 조치를 정당화하려고 왜의 존재를 과장하여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장군총은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묘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무덤의 주위에는 잔 자갈을 넓게 깔아서 일정한 넓이의 묘역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 묘역 좌측 뒤에는 배총군이 있다. 무덤의 내부는 석실로 되어 있고 외부는 7층의 계단식 적성총이며 모양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1면에 큰 돌을 3개식 모두 12개의 호석을 기대어 놓았다. 현재 우측면에 1개가 없어져 11개만 남아 있다. 쌓아 올린 장대석들은 모두 1,200여 개에 달하며 돌의 크기는 반드시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제1층은 큰돌을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작아진다.

 

 

오회분은 우산하 고분군에 속하는 고구려 돌방봉토무덤으로 집안분지 중앙에 투구 모양의 고분 5기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어서 오회분이라 부른다. 서쪽 고분이 1호분이고 동쪽으로 가면서 5호분가지 매겨져 있다. 오회분 바로 뒤편에는 통구 사신총과 방단돌무지무덤 등이 분포한다. 4호분과 5호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5호묘는 오회분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제시대에 금엽 4개가 출토되어 사엽총, 사혈총 등으로 불리거나 통구 17호분이나 서강 62호묘로 불렸다. 벽화에는 역사도, 사신도, 연화문, 화염문 등 다채로운 문양, 당초무늬, 연꽃무늬, 하늘나무, 악기 연주, 복희, 영와형 해신과 달신, 천왕과 북두칠성, 수레의 신, 신농시 등이 등장한다. 고구려의 악기인 완함 및 대각을 보여준다. 

 

 

 

산성하 고분군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고분 유적으로 통구고분군을 이루는 6대고분구의 하나이다. 총 1,582기의 고분이 우산북록의 산성 자산성 남쪽과 통구하 사이에 펼쳐진 평탄한 계곡 위에 무리를 이루고 있다. 산성하고분군은 비교적 다양한 유형의 고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로 보아 초기 적석총이 축조되는 2~3세기부터 대형 봉토석실묘가 다수 축조되는 6세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환도산성은 산성자산성이라고도 하며 국내성의 북쪽 2.5km 지점의 해발 676m의 산성자산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서쪽은 칠성산이 허준한 봉우리들과 연결되어 천연방어물을 형성하고, 북쪽은 깊은 계곡을 두고 소판차령이 솟아 있다. 동쪽은 통구하를 따라 비교적 넓은 산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산성의 형세는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 지형에 삼테기 형재를 이루고 있으며, 산성의 남쪽 바로 아래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가 흐르면서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다. 포곡신 산성으로 성벽의 총길이는 6,947m이다.

 

 

국내성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성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내성은 졸본성에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다. 압록강 우안 통구 분지의 서쪽 끝에 있는데, 몇 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내외벽을 잘 다듬은 네모뿔의 돌로 쌓은 석축성으로 편면은 사각형이고 방향은 115도이다. 동쪽 성벽의 길이는 554.7m, 남쪽 성벽의 길이는 751.5m, 서쪽 성벽의 길이는 715.2m이며 둘레는 2,686m에 달한다. 국내성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도 평양, 한성과 더불어 고구려 삼경의 하나였다.

 

 

통화에는 독립운동단체인 부민단이 1912년에 설립되어 있었다. 부민단은 자치기관으로 1911년 1912년 연속된 흉년으로 경학사가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워 이상룡 등이 재만한인의 복리증진, 자활대책의 강구, 자녀교육, 애국청년의 군사훈련, 독립운동기지 조성 등을 경학사 이념을 계승하여 조직하였다. 부민단은 정부의 기능을 가진 부민회로 개명하여 각 지방에는 총관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1919년 까지 자활과 교육사업에 주력하여 수십만의 이주교민을 보호하고 수천 명의 애단국청년을 양성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군정부를 조직하고 한족회로 개편하였다. 이상룡, 허혁, 김동삼, 김형식, 방기전, 황병문, 최명수, 최여명, 김진호, 이탁, 안동식, 양규열, 이진산, 성인호, 남정섭, 한규석, 성태영, 이봉규 등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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