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만주 독립운동사적지 탐방 4 (위황궁, 길림성, 의열단 결성지, 구길림 감옥터)

 

 

위황궁은 만주국의 황궁으로 1952년 1월 지린시 장완로에 개관, 1954년 9월 창시 위만주국황궁 내로 이전했다. 1978년에서 1987년까지 혁명 부문, 위만황궁 부문, 자연사 부문 등 지린성 박물관에 속한 부문이 하나씩 분리되어 지린성혁명박물관, 위황궁 내 위만황궁전례관, 지린성자연박물관 등 개별 박물관이 성림되었다. 2003년 9월 지린성근현대사박물관과 합병, 런민다제로 이전하여 오늘날의지린성 박물관 되었다. 선사 시대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유물 10만 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광개토대왕릉비 모형, 탁본, 고구려 시대의 술잔, 고궁벽화 모사도, 발해 및 동북 항일 운동관련 유물이 있다

 

 

길림성(지린성)은 중국 북동부에 있는 성으로 약칭하여 지라고도 부른다. 둥베이 지역 중부에 있으며 남동쪽으로 북한, 러시아와 인접하여 있다. 성도는 창춘이다. 후이춘에서 남쪽으로 동해까지 이르는 거리가 10여 ㎞에 불과한 지리적 이점으로 대외개방의 창구 역할을 한다. 주나라 때 숙신의 영토였으며 한나라 때는 부여, 당 나라 때는 발해의 영토였다. 요나라 때 상경, 동경 등의 도가 설치되었고 원나라 때는 요양행성에 속하였다. 명나라 때는 여진의 영토였고 청나라 말기에는 지린성이 설치되었다. 구석기 시대 말기인 약 4만 년 전에 만주족과 조선족의 선조인 위수인과 안투인이 살았다.

대동공장 구지

 

 

만보산사건은 1931년 일제의 술책으로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지역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벌인 유혈사태,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래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만주 등지로 이주하였는데 중국 동북지방에 이주한 조선인을 또다시 중국대륙 침략에 이요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었다. 만주에 세력을 형상한 중국민족운동 세력과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의 반일 공동전선투쟁에 대해 이를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음모였으며 이를 만주침략과 대륙침탈의 발판으로 삼고 국제적으로는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만보산사건토구위원회 등이 사태 수습에 참여하였다.

 

 

의열단결성지는 길림시 파호문 반씨객점 자리로 의열단은 1919년 중국 길림성에서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여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로 요인암살, 친일세력에 대한 테러 등을 감행하여 일본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의열단의 창단 기획 및 준비의 주역은 중국 길림의 조선독립군정사라는 조직원들이었고 그 중심에 황상규가 있었으며 김원봉은 그를 도와 창단 동지들을 모으고 묶어내는 일을 주로 맡았던 것임이 규명되었다. 황상규가 의열단 창단 과정의 산파였던 셈이다. 단원들과 똑같이 최초의 국내 특공거사에 밀입국하여 폭탄거사 실행을 함께 꾀하다 피체되어 장기 옥고를 겪었다.

 

 

김원봉은 동향 친우들인 김상윤, 한봉근, 한봉인과 재회했고, 이종암, 이성우, 서상락, 강세우, 신철휴 등의 다른 재학생들도 새로 알게 되었고 의기가 통하여 동지로 규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졸업 직후인 10월에 전원 길림으로 동행하여 집결하였다. 밀양의 3월 만세세위를 주동했던 윤제주와 윤치형, 창원의 4월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배동선, 교사이면서 청주의 3.1운동을 주동했던 곽재기가 모두 만주로 탈출한 후 길림에 와 있어서 그들과도 합류할 수 있었다. 이들 10여 명의 청년들은 길림성 파호문 밖의 중국인 집을 빌려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혔다.

 

 

11월 9일 밤에 다들 모여앉아 조직결성과 활동방침에 관해 밤새워 논의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생"할 격사대적 조직으로 의열단을 창립시켰다.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함",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을 확고히 가짐",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단의 실현에 매진함"등의 10개 공약을 정하고 비장한 결의도 다졌다. 황상규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자와 밀양 충신 청년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창립다원들은 서로 피를 나눈 형제처럼 굳은 의지로 뭉치고자 했다. 의열단 경성지의 현주소는 길림시 광화로 57호이다.

 


구길림감옥터는 지진시구 독립운동가들이 구금되어 옥고를 치뤘던 감옥으로 1927년 1월 말 길림에 와서 연설을 하던 안창호와 정의부 관련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던 곳이다. 안창호 등은 20여 일 동안 구금된 후에 풀려날 수 있었다.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운동이 고양되면서 다수의 한인 사회주의자들도 수감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현재는 15층의 고층건물이 들어서 옛날 길림감옥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길림시 사법국에 '수형자명부'등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았으며 여행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더 자세한 내용은 주최측 및 언론기사 등을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