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한국 가톨릭의 상징이자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 나들이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역 5번 출구 명동성당은 한국 가톨릭의 상징, 민주화의 성지로 한국 천주교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통칭 명동성당은 대한민국 서울 특별시 중구 명동 2가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대성당이다. 명동성당은 한국 최초의 사제가 상주하며 사목하는 성당인 본당으로 그 성당 건물은 한국 최초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천주교 성당으로 1977년 11월 2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58호로 지정. 한반도에서 처으믕로 지어진 대규모의 고딕 양식 천주교 성당이다. 

명동성당은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의 주교좌가 있는 서울대교구의 중심성당으로 주보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이다. 주변에 서울대교구청, 가톨릭 회관, 성 바오로 서원, 다양한 문화시설 등이 있다. 2009년 외벽 벽돌 보수공사가 이뤄졌으며 2011년 이후부터 언덕 남쪽에 별관을 짓는 개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대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터전을 닦았고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명례방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이며, 명례방은 조선시대 한성 5부에 속하는 남부 11방의 하나로 남산 아래에 있던 여러 마을과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성당 부근까지를 포함하는 구역 명칭이었으며 김범우의 집은 명례방의 궁중 음악을 관장하던 관청인 장악원 앞에 있었다. 이승훈은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를 준 뒤에 신앙집회를 갖기 시작했는데 김범우도 1784년에 세례를 받았다. 

 

1785년 봄에 명례방공동체가 도박단으로 의심한 형조의 사령들에게  적발되어 집회의 참석자들이 체포되고 천주교 서적과 물건들을 압수당하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다. 김범우는 형을 받고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장형의 상처가 악화되어 1년 후에[ 죽었고 이벽은 부친의 강요 때문에 진자들과 접촉을 끊고 지내다가 얼마 안 되어 전염병으로 사망, 명례방 공동체는 와해되었으나 이듬해부터 천주 교 신자들은 이승훈을 중심으로 다시 교회 재견에 힘썼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풍수 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프와넬 신부때에 건축을 마무리짓고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준공된 후 지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됐었다. 순교한지 약 20일 후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 삼성산으로 이장, 1901년 이곳으로 모셔졌다. 

 

 

1926년 기해교난과 병오교난 때의 순교자 79위의 유해를 지하 묘소에 모셨다가 대성당 좌측 회랑에 복자제대를 설치하고 79위 성화를 모셨다. 1950년 전쟁 때에 대성당이 인민군에 점령당해 지하 묘소에 안치 중인 순교자 유해가 손괴당하디고 하였다. 민주화 투쟁의 중심지로 인식되기도 하였으며 1991년 퇴락한 유해를 포장하고 부식된 납관 등을 새로 제작했으며 유해를 안치한 후 봉인하여 석관에 모시고 이를 새로 말끔히 단장한 현실에 모신 후 비명을 적은 석판을 세웠다.

 

수시로 순례자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묘역의 입구를 유리문으로 개조 설차하였으며 평일과 주말에 미사와 고해성사 시간을 갖는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참여할 수 있으며 크리스마스 때는 주위의 화려한 거리 장식 사이에서 경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성당으로 접근할 때는 가파른 경사 때문에 어려움이 있지만 입구로 진입하면 내부는 경사 없이 평탄하여 접근하기가 쉬운 편이다. 

병인박해 이후 바뀌어진 국제 정치 상황 속에서 조선이 외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천주교 역시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는 단계를 거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형성되고 발전된 한국 천주교회 모든 신자들의 의식 한 가운데 서울의 신앙공동체, 특히 이벽과 이승훈에 의해 시작된 명례방공동체가 자리하고 있고, 이  공동체가 탄생한 지역에 조선대목구 주교좌본당이 설정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을 이어주고 있다. 명동본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바티칸의 의미가 있다.

 

<여행지 개요>

여행지명 : 명동성당
장소 : 서울 특별시 중구 명동 2가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았으며 여행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비즈니스 문의는 받지 않습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더 자세한 내용은 주최측 및 언론기사 등을 확인하세요"
"공감과 댓글은 글 작성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