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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김달삼은 누구인가

 

 

김달삼은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제주이며 1923년 8월 4일에 태어나 1950년 3월 20일에 사망하였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성봉중학교와 도쿄의 중앙대학에서 수학하던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하였다.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인데 이승진은 이를 이어받아 사용한 것이다. -위키백과-

 

 

해방 후 1946년 10.1.대구 항쟁에 관여했고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3발발기에는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김달삼은 친일파척결, 외지경찰철수, 자주독립 및 남북 통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5.10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48년 4월 28일 김달삼과 연대장 김익렬 간의 평화협상이 열려 적대행위 중지에 합의하였으나 우익청년단의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무산되었다. -위키백과-

 

 

남한 정권이 수립된 직후인 1948년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김달삼은 여기에 참가하여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이 해주대회는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예비 절차로서 남한에서는 1,002명의 대의원이 참가했고, 제주에서는 6명이 참가했다. 그는 여기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대 훈련을 받은후 1949년 8월 4일 강동정치학원의 4차유격대 대장으로 유격대원 300명을 이끌고 일월산 일대로 침투 경북 보현산에 거점을 구축한후 동해연단을 편성하여 유격전을 폈다. -위키백과-

 

 

제주를 탈출한 김달삼은 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 김달삼부대인 제3군단을 이끌었으며 영양과 영덕 일대에서 활동했다. 토벌군에 밀려 퇴각하던 중 정선군 북면 반론산에서 험난한 일생을 마감했다. 1950년 3월 20일 김달삼이 정선군 삼운리에서 국군 제185부대 수색대에 발견되었다. 공비는 반론산 동쪽을 수비하고 있던 제185부대 예하 제336붇대 2중대와 접전이 되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3월 22일 전장을 정리하면서 반론산으로부터 동북쪽 정선군내 지경리에서 김달삼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이 곳에는 김달삼 모가지 잘린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위키백과-

 

 

김달삼은 서귀포시 대정면 출신의 해방 정국의 사회주의 활동가, 김달삼은 본명이 이승진으로 본관은 고부이다. 1925년 5월 1일 제주도 대정면 영락리 978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평근, 어머니는 풍기 진씨이다. 부인은 남로당 중앙위원인 강문석의 딸 강영애이다. 김달삼은 가명으로 장인인 강문석이 쓰던 이름을 이어받아 사용하였다. 김달삼은 1946년 10.1 대구항쟁에 참가하였고, 1946년 10월 20일부터는 제주도 대정공립초급중학교 교사로 사회과목을 가르쳤다. 1947년 8월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부장이 되었으며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인민해방군 사령관으로 봉기를 주도하였다. -향토문화전자대전-

 

 

 

1948년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떠났으며, 그 대회에서 입후보자에 대한 토론을 통해 4.3봉기에 대한 연설을 하고 35명의 주석단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9월 2일부터 10일까지 개최된 조선최고 인민회의에서 49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해주대회 이후 평안남도 강동군에 설치된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하고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원에서 인민유격대 제3병단을 지휘하였다. 1950년 3월 22일 국군 8사단과의 교전 중에 사망하였다는 설이 있다. 김달삼의 묘소는 북한 평양 인근 형제산 구역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가묘로 조성되어 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강문석은 사회주의 운동가. 제주 4.3사건 때 남로당 제주 총책임자이자 유격대 총사령관이었던 김달삼의 장인이다. 상하이 중국공산당 한인지부에 입당해 활동했으며 상해한인반제동맹을 결성했다. 광복 후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강문도, 황정, 산하라고도 불리었으며 1906년 제주특별자치도 남제주군 대정읍에서 태어났다.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제주 4.3사건 때 남로당 제주 총책임자이자 유격대 총사령관이었던 김달삼의 장인이다. 대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 4월 모슬포에 한남의숙을 설립한 뒤, 모슬포청년회 회원으로 민중계몽운동과 청소년운동을 벌였다.  -두산백과-

 

 

1928년 4월 도쿄로 건너가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교류하였으며, 전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가입하여 화학노조 상임위원이 되었다. 같은해 10월 오사카 히가시나리구의 조선인 노동자와 함께 공장을 습격하였다가 11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1931년 8월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1년 9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 한인지부에 입당하였으며, 1932년 박헌영, 조봉암, 김형선, 김단야 등과 함께 상해한인반제동맹을 결성하여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2년 10월 프랑스 조계 경찰에 홍남표, 조봉암 등과 함께 체포되어 국내에 투옥되었다가 일본에서의 항일운동 사실이 드러나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두산백과-

 

 

이후 출옥하여 1939년에 박헌영이 결성한 조선공산당 재건 비밀조직인 경성콤그룹의 일원이 되었으며, 1941년 사상범 예방구금령으로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2월에 결성된 좌익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노동문제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946년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한반도의 현안 문제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일본공산당 서기장 도쿠다 규이치와 회담하였다.  -두산백과-

 

 

1946년 11월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의 3당이 합당되어 결성된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50년 10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사회부장이 되었다. 1953년 8월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955년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종파사건에 연류되어 숙청되었다.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