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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독립을 꿈꾸던 충청남도 홍성을 찾아 김좌진장군, 한용운을 만나보자.

 

 

독립을 꿈꾸던 이들의 생가를 찾아 충청남도 홍성으로 찾아가 보자.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김좌진 장군과 애틋한 시어로 독립의 꿈을 노래했던 한용운 선생이 있으며, 길산면 행산리에는 김좌진 장군 생가지에는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결성면 성곡레에 자리한 한용운 선생의 생가지 부근에는 민족시인 20명의 시와 어록을 자연석에 새겨 소나무 숲길을 따라 배치해놓은 '민족 시비 공원'이 눈에 뛴다.

 

 

김좌진장군 생가지는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46번길 12에 자리하고 있으며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항일 전투에 몸 바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힘쓴 분이다. 생가터에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백야 기념관이 있고 왼쪽에는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다.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 생가터는 기와집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생가지에는 너른 마당의 장독대와 우물 터가 있고 바깥마당에는 말을 키우는 막사도 있을 정도이다. 안방에 걸린 김좌진 장군의 초상과 대청마루와 장군의 서한 그리고 공부를 하던 서탁 등 생활 도구들이 그대로 전시해 놓은 농기구 창고 등이 있다.

 

 

백야기념관은 김좌진 장군의 어린 시절부터 청산리 전투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청산리 전투 당시의 전황도를 비롯해 전투에 사용되었던 화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김좌진 장군은 15세 때인 1904년에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하였다.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 차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군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 신현대 등과 함께 박상진, 채기중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에 가입해 군사 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림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한용운은 호가 만해로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를 대표해 3.1독립선언을 이끈 분이고 <님의 침묵>등 300여 편의 시를 발표한 근대적이고 저항적인 민족 시인으로 활동을 했다. 한용운 생가지는 홍성군 결성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1991년부터 생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사적화하기 위한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생가인 초가, 사당, 삼문, 관리사, 화장실  등을 건립하고 아내판 설치 및 주변 정비 사업을 추진했다. 만해 한용운의 생가터에는 자그마한 초가 삼 칸으로 되어 있으며 한용운 선생이 태어난 자란 곳이다. 어린시절 이곳에서 시를 쓰며 나이 들어 독립운동가로 활동한다.

 

 

만해당은 만해사당으로 방명록에 사인도 하고 향을 태우며 한용운 선생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민족시비공원에는 님의 침묵을 비롯한 애국시를 새겨 전시해 두었다. 만해사당을 내려와 민족시비공원은 지나 만해문학체험관으로 향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어린 시절 선친에게 의를 배우고 서당에서 대학을 배울 때 만해의 아호인 유천은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부인이 앞마당에 멍석에 벼를 널어 놓고 잘 살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책 읽기에 몰두해서 새들이 쪼아 빈 쭉정이만 남긴 것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유택 모형을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이다. 이는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 비탈의 북향 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심우정에서 독립을 보지 못하고 입적한다. 민족시비공원은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지 뒤쪽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

 

민족시비공원으로 오르는 산책로 입구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 '복종'을 선두로 양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만해 선생의 사상과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만해 민족시비'공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닥불/백석, 나비의 여행/정한모, 절정/이육사,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자유/김남주, 바위/유치환,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김소월, 풀씨/조태일, 푸른 하늘을/김수영, 논개/변영로, 씬냉이 꽃/김달진, 가장 비통한 가욕/이상화, 낙화/조지훈, 간/윤동주, 해/박두진, 고향/정지용, 오늘/구상, 그날이 오면/심훈, 나의 사랑하는 나라/김광섭 등의 시비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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