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홍성 역사인물축제

 

 

홍성 역사인물축제는 2019년 9월 27일부터 2019년 9월 29일까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의 홍주읍성 일원에서 총성군 주최로 펼쳐진다. 홍성은 마지막까지 충의를 지켰던 고려말의 명장 최영장군, 불의에 항거하여 굳건한 절개로 만천하에 이름을 떨친 성삼문, 일제에 항거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한용운 선사, 청산리 전투의 승전보를 울렸던 김좌진 장군, 조선 춤의 대가이며 한구무용의 본류인 한성주 선생, 해외에서 더 유명한 현대미술가 이응노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홍성이 배출한 역사인물을 즐기면서 배우는 에듀테인먼트 축제이다.

 

 

최영은 호가 무민공으로 1316년에 태어나 1388년에 생을 마감한다. 주요활동으로 고려의 명장으로 홍건적격파, 왜구격파에 큰 공을 세운 고려의 장군이다. 공민왕 1년인 1352년에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1358년 400여 척의 배로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하여 격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격퇴하여 개경을 수복하였으며 우왕 2년인 1367년 왜구가 연산 개태사에 침입하자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 부원군이 되었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에 침입하자 이성계, 양백연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찔렀다.

 

 

최영은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 이동을 요동에 예속 시키려 하자, 요동에 예속 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5,000여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성계에게 잡혀 지금의 고양인 고봉현으로 귀양 갔고, 다시 지금의 마산인 합포, 충주로 옮겼다가 개경으로 압송되어 12월에 참수되었다. 그 후 이성계가 무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삼문은 호가 매죽헌으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조선왕종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힌다. 세종 17년 143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날에 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해 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성삼문은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능지처형을 당했으며 집안도 멸문의 참화를 당했다. 숙종 17년인 1691년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영조 34년인 1758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숙종 2년인 1676년에 이량과 호서의 유림 등이 선생의 옛 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이라 하였고, 뒤에 노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서원이 철폐되었으나 노은단이라고 하여 음력 9월 16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용운은 고종 16년인 1879년 8월 29일에 걸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에서 창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 본명은 정옥, 불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라고 한다. 6세때 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때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고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자 반대운동을 일으켰으며 '조선불교유신 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만해 한용운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을 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독립의 서'를 썼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 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지조가 곧고 절개가 있어 일제와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바치다가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였다. 묘지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 정상에 부인유시와 같이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홍성군은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에 생가 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였다.

 

 

김좌진장군은 호가 백야로 18세 때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과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7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31세가 되던 해에 시베리아로 출전 중이던 일본군 3,000여 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1,200여 명을 전상자로 만든 7일간의 전투가 바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금자탑을 이룬 1920년 10월 21일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이다.

 

 

 

백야 김좌진장군은 1925년 김혁, 최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국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취임하여 재미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24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부근 정미소 앞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삭상실의 횽탄에 순절하였다. 홍성군은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김좌진장군의 사당은 내외삼문, 재실, 주차장 등이 조성되었으며 매년 10월에 김좌진장군의 청산리 전투 전승기념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성준은 1875년 6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신안리 빈한한 농가에서 한천오의 6암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1941년에 68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1879년부터 민속무용과 줄타기로 유명했던 조부 백운채에게 춤과 장단학습이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7살때부터 '승무'를 공부하고 8살때부터 여러 잔치 행사에 출연, 천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1881년 무렵에는 홍패사령을 따라 다니며 줄을 타거나 재주를 부렸고 14세가 되면서는 홍성골 서학조에게 줄과 재주를 3년간 배웠다. 1938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40여가지의 전통춤을 재구성하고 집대성하였다.

 

 

한성준은 중요문화재 제27호 승무, 중형무형문화재 제29호 태평무 등 여러 유형의 전통춤 창안 및 재구성한 춤의 대가로 1940년 2월 부민관에서 제2회 무용발표회를 열어 학무, 살풀이춤, 태평무, 사자무, 신선무, 동자무, 아리랑무 등 20여 종목을 공연하였으며 4월 일본 동경 히비아 공회당에서 첫 해외 공연을 가졌다. 1941년 5월 소설가 이태준, 화가 고희동 등과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하였다. 손녀 한영숙에게 모든 춤을 물려주고 낙향하여 68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이응노는 21세인 1924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이후 일제시대에 이 전람회에서 여러차례 수상하였다.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파리에서 생을 마칠때까지 온 삶을 글미으로 채운 화가이다. 호는 고암으로 일본 유학을 거쳐 해방후에는 새로 개설된 홍익대학교 미술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50대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고암 이응노는 한국의 전통 서화를 바탕으로한 작품을 선보여 유럽 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학교를 세우고 서구 젊은이들에게 동양 예술을 가르쳤다. 고암 이응노가 남긴 3만여점의 작품은 전통서화부터 현대의 추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폭넓다

 

고암 이응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의 치욕, 해방의 기쁨과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격동기였다. 1960년대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다시는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열일곱 나이에 상경하여 도쿄로 다시 서울로, 또 파리로, 쉼없이 이어지는 긴 동선속에서 예술세계와 함께 한 인간의 의식세계가 확장해가는 여정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고암 이응노는 끊임없이 낯선 것을 받아들여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마침내는 인종, 남녀, 노소, 취향까지 융화시켰다. 안주는 감히 그의 삶과 화폭에 침입할 수 없었다.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았으며 여행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더 자세한 내용은 주최측 및 언론기사 등을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