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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현존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숭례문 탐방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찾아가는 서울역 4번출구로 나와서 쭉 걸어가면 숭례문을 만날 수 있다.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 4가 29에 자리하고있으며, 숭례문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국보 제1호로 조선시대 서울도심을 둘레 성곽의 정문이다. 서울의 4대문과 4소문이 있다. 창의문, 숙정문, 혜화문, 흥인지문, 광희문, 숭례문을 끼고 성곽길이 있었으며 그 사이에 경의궁, 덕수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있었다. 청계천도 그 안에 지나간다. 

 

숭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이라고 불린다. 태조 5년 1396년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 1398년에 완성되었고, 세종 29년, 1447년에 개축하였다. 성종 10년 1479년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다. 중앙부에 홍예문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벽돌로 된 여장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을 열었고 건물 외주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머리 ,그리고 용마루 약ㅇ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청장으로 되어 있다.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제,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헤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기와를 올리고 일제강점기에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조선시대 도성에서 정동의 흥인지문, 정서의 돈의문, 정남의 숭례문, 정북의 숙청문 등 4개의 성문이 있었다. 흥인지문의 현판은 오행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흥인지문이라고 '지'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동대문의 중층 누각은 1869년에 새로 지은 것인데 조선왕조 말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로 건축양식의 시대적 변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돈의문은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이라 불리었다. 1422년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아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으며 시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1479년에 중수 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이 아니라 종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자는 오행의 화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한양의 조산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산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숙청문은 하냥의 주산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의 규모를 따랐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다가 1504년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ㅝㄴ하는 영제 ,즉 기청제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숙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여행지 개요>

여행지명 : 숭례문
장소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 4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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