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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경복궁은 조선 시대의 궁전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경복궁은 조선 시대의 궁전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서울은 외사산이 북쪽의 북한산, 남쪽의 관악산, 동쪽의 아차산, 서쪽의 덕양산이 넓게 감싸고 내사산으로 주산인 북쪽의 백악산, 안산인 남쪽의 남산인 목면산, 동쪽의 낙산인 타락산, 서쪽의 인왕산이 감싸안은 곳으로 그 너른 품이 넉넉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경북궁은 서울의 중심인 백악산 남쪽에서 서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은 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경복궁이란 명칭은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으로 경복은 시경 대아의 기취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에서 따온 말이다. 경복궁이 실질적으로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궁궐의 문과 다리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홍례문, 광화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에 지어졌다.

 

세종은 동궁인 자선당을 창건하고 근정전과 건춘문, 강녕전을 수리하였으며 경회루와 사정전을 중수하고 북문을 신설하여 궁성의 4문 체재를 완성하였다. 궁전과 행랑으로만 이루어졌던 초기의 경복궁은 창건 30여 년이 지나 비로소 궁성과 궐문까지 갖춘 완비된 궁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경복궁은 중종 38년 1543년 동궁의 화재, 명종 8년 1553년 큰 화재로 강녕전과 사정전, 흠경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지속적인 증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고 173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다가 고종 2년 1865년 흥선대원군의 의중에 의해 경복궁 재건공사가 고종 5년 1868년에 마무리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왕실과 국권의 상징인 궁궐을 조직적으로 훼손하였다. 경복궁은 끊임없이 훼손당해 무려 4,000여 칸의 건물이 방매되거나 철거되어 그 규모가 10/1정도로 축소되었으며 해체된 무수한 전각은 일본인의 개인집이나 사당, 사찰을 짓는 데 쓰이기도 했다.  

 

현재 복원된 경복궁은 정문이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 영제교를 지나면 기능에 따라 영역이 나뉜다. 외전 영역에는 근정문, 근정전이 있고, 내전 영역에는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 경회루,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함원전, 흠경각, 교태전이 있다. 생활주거공간 영역으로 자경전, 집경당, 함화당이 있으며, 후원 영역에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따위의 건물이 있다. 궁궐의 담인 재성의 사방으로 문으로 남쪽의 광화문, 북쪽의 신무문, 동쪽의 건춘문, 서쪽의 영추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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