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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유네스코 세계유산지를 산책하는 남양주의 하루

 

남양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지 산책으로 천마산을 중심으로 축령산, 불암산, 운길산이 둘러싸고 있고, 남한강과 북한강을 끼고 있어 빼어난 경치를 타고난 행운의 도시, 남양주시를 찾아가 보자, 남양주시를 찾아가면 느릿느릿 살아가는 삶의 여유가 소중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몽골문화촌은 남양주시 수동면 비룡로 1635의 천마산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1998년 남양주시와 몽골 우란바트라시가 체결한 우호협력 조약에 따라 만들어진 곳으로 몽골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관 내에는 몽골의 전통의상과 악기, 생활용품 등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800여점에 걸친 다양한 전시품들을 관람할 수 있으며 320여 석의 관람석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몽골 문화에술 공연을 즐길 수 있다. 몽골 문화예술 단원들이 상주하며 공연을 펼치고 있으며 몽골 전통노래, 춤, 악기연주, 기예, 줄서커스 등 다채로운 공연을 펼치고 있다.

 

봉선사는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길 32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사찰이다. 봉선사는 크낙새와 수목원으로 널리 알려진 광릉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광릉 매표소에서 광릉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전나무 숲길 따라 남동쪽으로 1.5km쯤 내려가면 수십채의 식당이 영업 중인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300m가량 들어간 곳에 봉선사가 있다. 봉선사의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 원래 봉선사 자리에는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에 법인 국사가 창건한 운악사라는 절이 여러차례 난리를 겪으며 폐허가 된 것을 1469년에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를 위해 봉선사라 개칭하였다.

 

봉선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과 중건을 7차례 했으며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큰 비석 여러 개가 눈길을 끌고있다. 그 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선생 기념비이다. 이광수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 동안 남양주 사능 부근 작은 집에서 산적이 있는데 그때 한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운허로서 인연을 맺었다. 비석에는 그가 남긴 글중 일부를 빼곡히 새겨 놓았는데 글은 주요한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써서 1975년 가을에 세웠다.

 

 

봉선사에는 대웅전 처마 밑에 걸린 현판에 대웅전이라고 하지 않고 큰 법당이라고 한글로 쓴 것이 이채롭다. 1970년 춘원 이광수 선생의 팔촌 동생인 운허선사가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달았다. 또한 경내에는 보물 제397호인 봉선사 대종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동종 중에서 몇개 남지 않은 것으로 예종 원년인 1469년에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조선왕조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의 하나이다. 큰법당, 관음전, 지장전, 삼성각, 조사전, 청풍루, 방적당, 운하당, 개건당, 다경실, 판사 관무헌, 동별당, 서별실, 선열당, 회랑 등의 전각을 보유하고 있다.

 

광릉분재예술공원은 포천시 소흘읍 죽엽산로 631번길 48의 4만 5천 여 제곱미터의 부지에 분재공원, 조각생태공원, 규화석공원, 미술관, 잔디광장, 수영장, 인공폭포, 눈썰매장 등을 갖추고 있다. 광릉 숲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끼고 조성된 분재 고우언에는 송백분재, 상화분재, 상과분재 등 40여종 400그루의 분재가 모양목, 문인목, 현애, 취류형 등 각각의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과 전시관에는 각종 수석들과 동물 조각상 3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규화석 공원에는 중생대 백악기의 나무가 화석으로 규화된 50여 점의 규화석군이 전시되어 있다. 삼림욕장, 방갈로, 펜션, 퓨전한식 및 웰빙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남양주 사릉은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왕조의 가장 비운의 여인으로 꼽히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무덤이다. 정순왕후는 1453년 왕비로 간택외었으며 2년 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덕왕대비에 봉해졌으며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있는 유배지로 보내지고 정순 왕후도 부인으로 강봉되었으며 단종이 사사되면서 정순 왕후는 궁궐에서 추방당해 동대문 바까 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들어가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왕후는 늘 통곡하였으며 이로 인해 동정곡과 동망봉 이외에도 많은 유래가 생겨났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정순왕후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세조가 내린 집과 식량을 끝내 받지 않았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다간 정순 왕후는 죽어서도 여인네들의 한을 달래는 토속신으로 숭앙되었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인 1698년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고 했다. 사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봉분 앞에 상석 1좌, 상석 양축제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 석양, 석호 각 1쌍이, 바깥쪽에 나지막한 담, 아랫단에 문인석, 석마 각 1쌍, 장명등이 자리하고 있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은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와 그 비를 모신 곳으로 사적 제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릉은 대한제국 초대 고종황제와, 명성 황후 민씨의 능이고, 유릉은 마지막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황후 민씨 및 게비 순정황후 윤씨를 모신 능이다.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 민씨의 능으로서 서울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의 승하로 국장할 때 이곳에 옮기어 함께 모셨다. 유릉은 원래 순명황후 민씨의 능으로 양주 용마산에 있었으나 순종 인산 때 이곳에 이장하였고, 1966년 순정황후 윤씨를 또한 이곳에 함께 모셨다.

 

홍릉과 유릉은 종래의 왕릉과 형식이 다르며 모두 광무 이후 황제라 칭하던 왕이었던 만큼 명태조의 효릉을 본따서 조영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고 그 앞쪽으로 문무석을 세우고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으로 석수를 세워 놓고 있다. 홍릉 석물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만들어진데 대하여 유릉 석물은 사실적이고 개성적이며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다. 청량리에서 경춘가도를 가다 도농동 삼거리 검문소에서 춘천쪽으로 약 4km 지점 오른편에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왕. 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돵의 무덤인 능도 세자의 무덤인 우너도 아닌 일반인의 무덤인 묘로 격하시키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왕공가궤범을 따르자면 고종과 순종의 무덤은 왕릉이 될 수 없엇는데 이때 왕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조의 비 순명효황후의 유릉이었다. 고종의 장례 때는 명성황후의 재궁을 원 홍릉에서 현 홍릉으로 옮겨와 합장하였고, 순종의 장례 때에도 구 유릉에서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모셔와 합봉하였다.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이것을 막을 법적인 근거가 없었으며 능의 이장 문제 또한 이왕직이나 총독부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실 내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 탈 없이 처리되었다. 원래 왕릉 장범에 따르면 새로운 능호를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의 간섭으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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