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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여주 가볼만한곳으로 만나는 역사의 흔적, 신륵사, 여주 박물관, 명성황후 생가

 

 

여주 가볼만한곳으로 여주 신륵사를 비롯하여 여주 박물관과 명성황후 생가, 여주 고달사지와 영릉 등을 둘러보자. 여주 가볼만한곳으로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주 탐방, 여주는 한반도의 중앙부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 충주, 남서쪽은 이천, 서쪽은 광주, 북쪽은 양평군과 접한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주탐바응로 고달사가 있던 사찰터에서 부터 신륵사, 여주박물관, 세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 까지 이르는 여주 역사탐방으로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자.

 

 

여주 고달사지는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로 271-15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달사가 폐사가 된 사찰터이다. 고달사는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되었던 사찰로 고달원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광종 이후 역대왕들의 비호를 받던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여주시 혜목산 산자락에 절터만 남아 있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실로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으로 추정되며 절 부근에 큰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광활한 사역에는 유물만 남아 있다. 현재 절터는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가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고달사터에는 고려시대의 부도를 대표하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와 보물 제6, 7,  8호의 유물들이 있으며 이들 석조 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원감국사의 부도로 추정되는 고달사지 부도는 빼어난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국보 제4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석불대좌, 강렬한 힘을 간직하고 있는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고있는 원종대사 혜진탑 등이 있다.

 

 

신륵사는 여주시 신륵사길 73에 자리하고 있으며, 여주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상류 봉미산 기슭에 있는 오래된 전통 사찰로 신라 진평왕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다양한 유물이 숨쉬고 있는 고찰이다. 고려말 우왕 2년인 1376년에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조선 성종 3년인 1472년에는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라고 불렀으며 1858년에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가 호조판서 김병기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토록 하였다. 이때 부터 신륵사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신륵사 인근 강가 쪽의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탐이 있어서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렀다. 나옹화상이 이 절에서 입적을 했고, 그의 보제존자석종은 137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석종 옆에 있는 석종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고 한다. 역사가 깊고 규모도 웅장하며 주위의 경관도 뛰어난 사찰로 경내에는 화려한 극락전을 비롯하여 조상당 명부전, 다층석탑, 다층전찹, 석종,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다. 조사당 근처의 구릉에 있는 석종 하나가 그에 딸린 비 및 비석등과 함께 세워져 있다. 나옹화상의 부도이다.

 

 

여주박물관는 여주시 신륵사길 6-12에 자리하고 있으며 , 1997년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문을 열었으며 2016년 7월 14일 새롭게 개관한 여마관의 건립으로 각지에 흩어졌던 여주지역 발굴출토 국가귀속유물을 한자리에 모았다. 여주박물관의 황마관에는 기획전시실, 류주현 문학전시실, 남한강 수석전시실, 조선왕릉실이 있으며, 신관인 여마관에는 여주역사실, 카페테리아, 학예연구실, 강의실 등이 있다. 매년 특별기획전과 전통문화교육 운영, 박물관대학 운영 등 여주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 체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주박물관은 여주 역사의 고증자료 및 문화예술, 역사유물 등의 자료를 수집 보관 전시하고 향토사를 조사 연구하여 교육자료로 제공함으로써 향토의식을 함양시키고 시민의 애향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 1997년에 지하 1층, 지상 2층 2개 전시실, 수장고, 시청각실, 사무실 등을 마련하였으며 2016년에 여주박물관 신관인 여마관을 개관하였다. 야외전시에는 목은 이색 시조비, 백운 이규보 문학비, 묵사 류주현 문학비, 동자석, 문석인, 향로석, 주어사지 위암당대사 정여 승탑, 승탑, 고달사지 수습 용두, 우물 상석, 연자방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승탑은 부도라고도 한다.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169-50에 자리하고 있으며, 영릉(英陵)은 세종대왕의 능으로 세종대왕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원형을 이루었던 우리 민족은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 언어, 문화, 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족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영릉(英陵)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로 1977년에 건립한 유물전시관이 세종전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와 세종대에 간행된 책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문화재청은 대왕의 탄신일을 맞아 매년 양력 5월 15일 오전 10시 30분에 세종대왕의 유덕과 위업을 기리는 숭모제전 행사를 국가행사로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 세종대왕위업 선양단체, 일반 관람객이 참석하여 세종대왕릉 정자각에서 봉행한다. 탄신 다례행제에는 대왕이 친히 지으신 봉래의를 국립국악원 연주단 및 무용단에 의해 공연된다.

 

 

영릉(寧陵)은 17대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무덤이다.  영릉(寧陵)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 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 왕조 와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 석호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상, 문인석, 석마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 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여주시 명성로 71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 대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인 1851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명성황후 기념관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으며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전시실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 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 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한다. 명성황후의 친피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해던 일본도의 복제품,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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